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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2:14) ...
       
 
  
 

[특집 일곱교회]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교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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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8일 월요일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요한계시록 2:18~20)


당회장 이재록 목사

두아디라는 당시 군사와 교통의 요지로 공업 및 상업이 번창했으며 각 산업마다 노동조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업종과 관련된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생계에 큰 지장을 받을 정도였으며 조합원은 정례적인 행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노동조합마다 그들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우상의 제물을 먹고 신전의 창기들과 더불어 음행이 이어졌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교훈은 무엇일까요?


1.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모든 어둠을 환하게 밝히며 따사로움을 느끼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동시에 모든 죄악을 태우며 각 사람의 마음을 감찰해 진리와 비진리를 밝히 분별하는 불꽃이기도 합니다. 곧 불꽃 같은 눈동자로 각 사람의 마음과 뜻과 생각을 감찰하시므로 그 눈이 '불꽃 같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요한계시록 1:15에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말씀하셨습니다. 금, 은, 주석 등을 정련하는 과정에 풀무질을 할수록 온도가 올라가 불순물이 제거됩니다. 풀무에 단련하는 만큼 금속의 순도가 높아져 가치가 더하고 빛이 나지요.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주님께서는 발조차도 빛난 주석같이 깨끗하며 순결하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모습을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다'고 하신 것은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영광과 위엄이 어떠한지를 다시 한 번 깨우쳐 주기 위함입니다. 또한, 주님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고 만물을 심판하며 지극히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분임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요 20:31; 요일 4:15).
주님께서는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극한 영광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이신 주님이므로 다른 어떤 피조물이나 형상에 경배하거나 섬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2.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 말씀을 주님의 칭찬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 칭찬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단지 그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이 식어 처음 행위를 잃은 것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것과는 반대로, 두아디라 교회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행위는 처음보다 더 깊고 승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오직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말씀하신 '사업'이란 이윤을 추구하는 육적인 사업이 아니라 주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업, 곧 영혼 구원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영혼 구원을 위해 전도하고 심방하고 선교활동을 벌이는 것, 여러 가지 사명을 맡아 충성 봉사하는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런저런 육적인 사업을 벌이는 사람이 있는데, 대부분 그 안에 개인의 이익을 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감추고 있지요.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분란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혹여라도 교회 안에 세상적인 사업과 관련된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그 일에 관해 대화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성도 간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 희생하되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며(요일 4:7~8)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므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되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러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진실과도 직결되는데, 두아디라 교회에는 믿음 또한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거짓되면 다른 사람이 진실을 말해도 믿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진실이 있을 때라야 상대의 진실도 알아보고 믿어 줄 수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진실이 임한 만큼 진리인 하나님 말씀도 믿을 수 있고, 온전한 믿음도 임합니다(히 10:22).
또한 두아디라 교회에는 섬김이 있었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과 같이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도 섬기기 위해서였지요(빌 2:6; 막 10:45).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물론, 성도 간에 서로 섬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은 겉으로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서 섬기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진심어린 존중과 섬김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두아디라 교회에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천국 길은 좁은 길이므로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마 7:13~14).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는 수고도 있어야 하고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애매히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할 때는 이런 일들이 힘들다고 생각될 수 있고,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지요. 하지만 고난 뒤에 받을 영광과 상급을 믿기에 인내하며 천국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롬 8:18).
그러면 주님께서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단지 겉으로 보이는 행위 면에 있어서 많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행함이 '정녕 진실한 것이었는가'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이지요.
외형적으로는 구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 선한 사업을 벌이고 그 규모도 점점 더 커졌지만, 그 목적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한 사업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업의 목적이 자신들의 선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이세벨은 기원 전 9세기경,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서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왕비가 된 이방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아합 왕과 결혼하면서 시돈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 신을 이스라엘에 들여왔습니다. 결국 아합 왕은 물론, 신하와 백성들까지도 우상 숭배에 물들게 했지요. 이로 인해 삼 년 반이나 계속되는 가뭄과 이방 민족의 침략 등으로 온 나라가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리고 오랜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하는 등 놀라운 기적으로써 참 신이신 하나님을 증거했음에도 이세벨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죽일 생각만 했지요. 아합 왕을 사주해 각종 술수와 궤계를 일삼으며 악을 쌓은 그녀는 결국 엘리야의 예언대로 그 시체를 개들이 먹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과 같은 악의 근원을 교회 안에 용납함으로써 죄악에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연합하면 안 된다고 경계하셨습니다(고후 6:14~16). 더욱이 교회 안에 세상 풍조를 끌어들이는 일이나 비진리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은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과 결혼하거나 사업을 같이 하면 그만큼 자신에게도 시험과 환난이 따릅니다. 아무리 열심을 낸다 해도 하나님 뜻과 반대로 가는 사람과 연합한다면 자신의 믿음에 훼방받으며 차츰 미혹되어 물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세벨과 같은 사람을 받아들여 그들과 연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4.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제단에 올린 음식을 먹는다는 문자적인 의미보다 음식을 먹을 때 따르는 온갖 범죄를 경계해 하신 말씀입니다. 즉 성도들이 이방인들의 종교의식에 동참해 이를 묵인하거나 동조하고 나아가 우상 숭배자들의 음행에까지 동참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지요.
사도행전 15:29을 보면 사도회의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에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의 네 가지를 멀리하도록 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에 따라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유대인들과는 달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에 사도회의에서 이방인들을 위해 극히 몇 가지를 제외한 다른 것은 허용하도록 결정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상의 제물을 금한 까닭은 그것을 가까이하다 보면 결국 우상 숭배나 그와 관련된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니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딤전 4:4). 따라서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앞에 놓인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반드시 정죄할 수는 없지요. 설령 우상 앞에 놓인 음식이라 할지라도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믿음으로 먹으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8:7을 보면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담대하지 못한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죄'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먹으면 이는 스스로 양심을 더럽힌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믿음이 약한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도 우상의 제물을 먹으니 나도 괜찮겠지" 하며 무분별하게 먹는다면 자칫 우상을 섬기는 일에 동참하는 더 큰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이로 인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시킨다면 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합니다.
행음이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육적인 행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로서 행음이란 하나님 자녀들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거나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성도들을 유혹해 세상 쾌락에 빠지게 하고 비진리를 좇게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그들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영적으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입니다.


5. 오늘날 두아디라 교회에 해당하는 경우들

두아디라 교회와 같이 종교의 현지 토착화라는 명목 아래 토착 신앙이나 풍습까지도 자신들의 종교 안에 포용해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허용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유일신 하나님 한 분을 섬기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이러한 일을 허용합니다.
물론, 조상의 은혜를 기리며 감사하는 마음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명분 아래 제사 의식을 허용한다면 하나님 말씀에 정면 위배됩니다(고전 10:20). 우상을 섬기는 이방 종교 단체와 교류하며 서로 축복을 빌어 주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너그러운 마음이고 인류 전체의 화합을 도모하는 선한 마음인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우상 숭배하는 여타 종교와 손잡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방 신의 기념일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거나 성전 안에 우상 숭배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피조물의 형상 앞에 절하며 복을 빌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를 경배하며 섬기는 것은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단지 구세주 예수님을 낳은 분께 대한 공경의 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은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를 향해서는 '어머니여' 하지 않고 '여자여' 하고 부르셨습니다(요 19:26~27, 요 2:4). 이 외에도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신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라 하셨으니 누군가 하나님을 낳은 것도,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출 3:14). 마찬가지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어머니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피조물인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셉의 정자와 동정녀 마리아의 난자를 통해 잉태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셨을 뿐입니다. 따라서 동정녀 마리아의 형상을 만들고 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밖에 여러 분야에서 진리에 위배된 모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안에서도 술과 담배를 허용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는 그 자체보다 이로 인해 많은 죄를 유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술과 담배로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고전 3:17).
그런가 하면 대리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중보자(딤전 2:5)가 되어 우리의 죄를 대속해 사해 주심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었는데도 대리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더구나 대리인이 '당신의 죄가 사해졌습니다'라고 말한다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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