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태복음 15:25~28)
만일 사랑하는 자녀가 학교에서 큰 문제를 일으켜 퇴학을 맞게 될 위기에 처했다면 부모는 학교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버럭 화를 내며 "당신 아들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니 당장 데리고 나가세요!" 하며 모욕을 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때 겸허히 모든 수모를 받아들이며 끝까지 선처를 바랄 사람도 있지만, '아니, 나를 이렇게까지 무시해?' 하며 자존심 상할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치료하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건만 개 취급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이것을 '자존심 상한다, 수치스럽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지요.
1. 개 취급을 당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백
예수님께서 이방 나라인 두로와 시돈에 머무셨을 때입니다. 한 여인이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며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했지요. 시대적 상황을 봤을 때 가나안 족속의 후손 수로보니게 사람이 유대인인 예수님 앞에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멸시 천대하며 상종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더구나 남자인 예수님 앞에 나와 여인의 몸으로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절박한 심정이 아니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이처럼 가나안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는데도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여자가 뒤에서 소리 지르니 보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지요. 그제야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고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즉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만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이에 여인이 예수님께 절을 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또다시 간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며 이방 여인을 개에 비유하셨습니다. 이는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신을 개 취급하는 말에 자존심이 상해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자신을 철저히 낮추지요. 이는 딸을 고치겠다는 일념에 올라오는 분을 삭이며 계산하고 짜내어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에 그 말씀에 일말의 서운함이 들거나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마음 중심이 선하고 겸비했기에 긍정의 말을 할 수 있었지요.
여인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감동을 받으셨던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여인의 딸이 그 시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철저히 낮춤으로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은 것입니다.
겸비한 마음이 아닌데도 순간에 간교한 지혜를 짜내어 겸손한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결국 본색이 드러나고 맙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선한 중심에 겸비함이 임해 있었기에 끝까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답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다면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감정이 나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역전시켜 감동을 줄 수 있지요. 만일 상대가 자존심 상할 말을 해도 선한 말로 감동을 주면 오히려 미안해하며 잘못을 깨우치게 됩니다.
2. 선으로 감동적인 고백을 한 선진들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한 세례 요한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고백합니다(막 1:7).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황송해 감히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지요.
또한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합니다(요 3:30). 그는 자신이 물러서야 할 때를 잘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높이려는 중심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칭찬하셨지요(마 11:11).
사도 바울 역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고백함으로 자신이 쌓아 온 것들은 철저히 버리고, 오직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최상의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빌 3:8~9).
주님을 몰랐을 때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난 후로는 자신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 15:8)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딤전 1:15)라고 고백하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나 컸던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했지요. 이러한 중심이었기에 신약 시대 가장 큰 권능을 베푸는 사도가 돼 이방인들을 구원하며 하나님 나라를 크게 이룰 수 있었습니다.
3. 겸비함으로 지적받는 선한 마음과 따르는 축복
누군가로부터 지적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세 가지로 분류해 보겠습니다. 자신은 어디에 속하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유형은 지적을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서운함이 틈타 충만함을 잃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지적한 사항에 대해 변명합니다. 핑계대고 변명하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제자리걸음하기 마련이지요. 세 번째 유형은 지적받은 것을 감사하게 받으며 부족한 모습을 고치기 위해 힘씁니다. 이런 사람은 신속히 진리로 변화돼 큰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적을 받을 때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지적을 통해 변화될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적받기를 사모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지적은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싫은 소리는 하기 싫고 다 좋은 소리만 하고 싶어 하지요. 따라서 지적을 받을 때 서운해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셔서 더 변화되라고 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신속히 영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을 철저히 낮춰 예수님 마음을 감동시키는 말을 함으로 복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 외에도 사도 바울이나 세례 요한 같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받아 귀한 그릇으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마음 씀을 가지고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상대를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되기 위해 말씀을 통해 발견된 비진리들을 회개하고 신속히 빼낼 뿐 아니라 진리로 채우심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