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회장 이재록 목사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갈라디아서 5:22~23 -
사람들은 종종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하거나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이해하지 못하거나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지요. 어떤 사람이라도 선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하나인 '자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자비의 열매란 무엇인가?
자비(慈悲)는 사전적으로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로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이러한 자비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고 당부하셨습니다. 자비의 마음은 사랑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영적인 사랑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아무런 대가 없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자비는 용서와 포용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는 마음이지요.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미워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며 힘과 위로가 되어 주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율법에는 돌로 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없이 땅에 무언가 쓰시더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하시지요. 그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둘 떠났고, 홀로 남은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당부하십니다. 곧 용서할 수 없는 죄임에도 용서함으로써 여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자비는 진정한 용서, 곧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설령 어떤 사람에게 큰 허물이 있다 해도, 혹은 중한 죄를 지은 것이 드러났다 해도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긍휼의 마음이 앞서지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이해해 주며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2. 자비의 열매를 맺은 사람의 특징
1) 편견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 "…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상대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이 없지요. 그렇다면 영적인 면에서도 편견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영적인 깨달음이 둔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장 과정 중에 결여된 부분이 있어서 분위기에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을 하거나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이도 있고, 주의 교양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자주 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 "아휴, 답답해. 왜 저것밖에 생각을 못할까" 하며 무시하고 멀리하는 마음은 없는지요? 또는 상대를 찌르는 말이나 무례한 태도로 무안하게 만드는 일은 없으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범죄한 이들을 볼 때 마치 자신이 재판관인 것처럼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하지만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범죄하여 하나님 앞에 징계받는 사람을 볼 때에도 긍휼히 여기며 그가 잘 이겨내기를 원합니다.
2)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구제합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곤란을 겪는 사람을 마음으로만 불쌍해하고 말로만 "힘내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 실질적인 힘이 되어 주려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약 2:15~16 ; 요일 3:17~18). 어떤 문제로든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상대에게 도움이 되기 원하고 고통을 덜어 주기 원하는 것이 자비의 마음입니다. 더구나 주님을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갈 영혼들을 볼 때는 어찌하든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마음을 씁니다. 저는 가난의 고통을 절실히 겪어 봤고, 질병으로 소망이 끊어지는 고통도 처절하게 체험했기에 이런 문제들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제 자신의 일처럼 느낍니다. 어찌하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고, 만나는 사람마다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제 소원이지요. 그래서 기도 끝에 얻은 답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가난과 질병, 온갖 재앙과 고난을 일일이 해결해 줄 수 없다 해도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면 되기에 한 영혼이라도 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더 큰 권능을 보여 주고자 했지요. 물론 권능을 보고 믿음을 가졌다 해도 그들이 든든한 믿음 위에 설 때까지는 영육 간에 지속적인 보살핌이 필요하기에 교회적으로 재정이 넉넉하지 않을 때도 최선을 다해 구제했습니다.
3)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한다면 때로는 지적이나 책망도 해야 합니다. 무조건 덮어 주고 용서한다면 상대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마음이 있다면 징계나 책망, 지적도 쉽게 하지 못합니다. 한마디 지적을 한다 해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잠 12:18). 특히 성도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해도 자기 의와 틀 속에서 영적인 사랑이 없이 지적할 때는 상대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여 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책망을 받지 못할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외식하는 자들아" 하고 책망하기도 하셨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라도 듣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지요. 또 그들은 가르치는 입장이었기에 백성들이라도 깨닫고 그들의 외식에 미혹되지 않게 하시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찌르는 말이나 허물을 들춰내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꼭 필요한 상황에서 권면을 한다 해도 상대의 입장에서 그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4)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고, 상대에게 공적을 돌립니다
어떤 대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 없이 내 것을 내줄 때 자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처음부터 아셨지만 아낌없이 사랑을 주셨습니다. 끝까지 그를 곁에 두시고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대하셨지요. 어찌하든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오히려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지요(눅 23:34). 이처럼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능히 용서하는 마음이 자비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설교를 듣고 양심에 찔린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이는 이미 그들을 용서했다는 증거이며, 마음에 어떤 미움도 없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열매가 온전히 맺혀 있음을 나타냅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아무리 성격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 해도 상대를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싫은 느낌을 바꿀 수 있고,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는 상대가 불쌍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뀌지요. 이렇게 생각과 느낌을 바꿔 나가면서 마음 안에 미움이나 악한 감정들을 뽑아 나가야 합니다. 또한 잘한 일이 있을 때 상대의 공으로 돌리고 잘못된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허물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라도 나보다 상대를 앞세울 수 있고 그에게 공적을 돌릴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공로를 인정받은 것처럼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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