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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14)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시리즈 4 -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라도


1844
2023년 2월 19일 일요일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1~22)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에게 해를 가한 상대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서 "한 번만 더 잘못하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겠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이 베푸는 관용이란 그 한계가 있어서 상대의 잘못을 한 번, 두 번, 혹은 세 번 허용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하다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선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되 끝까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여쭙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의 용서라면 굉장한 관용을 베푸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이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란 완전한 용서, 곧 무한대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용서 안에는 정녕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더 나아가 자신에게 해가 될지라도 모든 것을 용서해 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490번만 용서해 주셨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세상에서 '법 없이도 산다'는 말을 듣는 사람일지라도 막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비진리투성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악뿐만 아니라 악들이 마음속에 있는 자체를 악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마 5:28 ; 요일 3:15).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무한한 사랑으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에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 나간다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지요(요일 1:7).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2. 회개의 기회를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8~19장을 보면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심히 중하여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냥 멸하지 않으시고, 그래도 살려 줄 수 있는 조그마한 근거라도 없을까 하여 직접 사자(使者)들을 그곳에 보내어 살피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도 이 일을 미리 알려 주시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구해 보고자 여러 차례 간청합니다. 결국 의인 오십 명에서 시작해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확답을 받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고 말지요.
예레미야 18장 7~8절에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라고 말씀했습니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그 악에서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하리라는 뜻을 돌이키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용서에 용서를 거듭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악의 한계점에 달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니느웨는 어떠했습니까? 이곳 역시 악이 극에 달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였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로 멸하시지 않고 요나 선지자를 보내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요나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고 선포하자 왕과 온 백성, 짐승들까지 금식하며 회개하였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용서해 주시며, 그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에스겔 33장 14~15절에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비록 악인이라고 해도 회개할 기회를 주어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왕하 20장, 대하 33장), 온전히 죄에서 돌이키면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 죄과를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시 103:12).


3.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죽이고자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을지라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사랑의 중보기도를 올리셨습니다(눅 23:34).
여기서 '저희'란 당시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며 희롱하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어둠 가운데 행할 온 인류를 지칭하지요.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과 진리를 싫어하기에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빛 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리를 알지 못해 죄를 범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사랑의 간구를 대신 올리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용서와 사랑을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아무 죄 없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했지요(행 7:60).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 받은 후, 빛 가운데 행하려고 하면 원수 마귀 사단은 악한 자들을 사주해 방해하며 핍박합니다. 또 전도하다 보면 조롱하며 훼방을 놓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지요. 이때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대신 용서를 구하는 사랑의 간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으면 설령 자신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사람이라 해도 미워하거나 외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기도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일지라도 용서하실 수 없기에 우리가 대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해 줄 수 없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있지만 용서받지 못하는 죄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일서 5장 16절에 사망에 이르는 죄,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구하지 말라 했습니다(마 12:31~32 ; 눅 12:10). 성령에 참예한 후 타락하여 현저히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경우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지요(히 6:4~6).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짓는 경우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히 10:26~27).
이처럼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되 우리의 마음만큼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하지요.
또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의 죄까지도 대신 용서를 구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주님께서 영혼들을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모든 사람을 향해 참다운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30편 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고 공의대로만 판결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셨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성도들이라면 아무리 내게 해를 가한 사람이라도 중심에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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