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뉴스, 만민, 만민교회, 만민뉴스, 이재록, 재록, 닥터리
2025년 5월 8일 목요일 오전 4:46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정확히 아십니까?
최신 업데이트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2:14)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시리즈 6 - 사랑은 두려움이 없고


1639
2023년 3월 19일 일요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8~19)


온전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혹여 두려움이 있다면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받을 형벌이 없으므로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 주신 사랑을 알기에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수없이 고백했을지라도 막상 고난 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이게 된다면 이는 마음에 두려움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니 온전히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다 해도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 안에 맺혀진 사랑은 얼마나 진실하고 온전한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두려움이 있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봄에 따뜻한 햇볕을 받아 대지에서 새싹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처럼 하나님 사랑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 사랑이 움트고 온전한 사랑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임하면 두려움을 내어 쫓을 수 있는데, 아직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두려움이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두려움은 범죄로 인해 임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류 역사에 어떻게 죄가 들어왔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창설해 주신 에덴동산에서 각종 나무 실과를 먹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지요. 그런데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순간, 인류 역사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담은 죄로 인한 수치감으로 자기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며 나뭇잎으로 가리고자 했습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범죄하니 이내 부끄러움을 느낀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러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지요.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하나님의 음성이 죄를 짓고 나니 두려움으로 임한 것입니다.
결국 범죄한 아담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 말씀대로(창 2:17)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게 되었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지요.
그러면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가인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 아벨의 제사만을 기뻐 받으시자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시기와 질투로 인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맙니다.
범죄한 가인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자 그제야 가인은 너무 두려운 마음에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청합니다.
이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므로 두려움이 찾아오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범죄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만큼 두려움이 임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지도자로 하여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 능력으로 베풀어지는 열 재앙을 보았습니다. 또 모세가 지팡이를 내미니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오는 역사도 체험했지요. 험난한 광야 길에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받았고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자 백성들은 두려워 떨며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모세를 향해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을 진정시키며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까이 나아갑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지 못했지만, 모세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었고 그 마음을 닮아 악이 없고 성결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니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모세는 범죄한 백성이 진멸 당할 위기에 놓이자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지요. 이처럼 출애굽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 마음을 닮아 온전한 사랑을 이뤘기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선지자와는 이상 가운데, 꿈 가운데 만나 주셨으나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는 대면해 친히 말씀하실 정도였지요. 그가 지상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고 온 집에 충성했기 때문입니다(민 12장).

셋째로, 두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만큼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욥기 1장 1절에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늘 성결케 했으며 잔칫날이 지나면 혹시 그 자녀들이 잔치를 즐기는 중에 죄를 범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했을까 하여 자녀들의 수대로 번제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 힘썼지요.
그러나 욥이 이렇게 행한 이유는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욥은 재앙을 만난 후에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 3:25)라고 고백하지요.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으면서도 그 마음에는 '혹 내게 재앙을 주시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이뤄졌더라면 결코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면서 하나님을 오해해 말합니다(욥 2:10).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이유 없이 재앙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면 재앙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처럼 욥은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직접 체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나 사랑을 헤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성령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욥은 하나님을 오해하며 두려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욥을 참된 사랑의 차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게 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하는 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연단 받기 전에는 전해 들은 지식에 의해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알고 섬겼지만, 이제 직접 만나고 체험하니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지요.
오늘날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죄가 대속되는 구원의 길이 열려 있기에 사랑이 임하는 만큼 두려움이 물러가고,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2.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려면

요한일서 5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요, 그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은 성경 66권 말씀을 지켜 행하고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주고자 하고 아무리 어렵고 힘든 것이라 해도 기쁜 마음으로 해 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그 자체가 행복하고 기쁩니다.
물론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지고 전에는 담대하게 행한 일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이때는 비록 모든 말씀을 다 지키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깨닫는 만큼 행해 나가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행함을 보시고 마음에 감동함과 확신을 주십니다. 영적인 믿음을 주시며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고 진리대로 행할 능력을 주시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하나하나 지켜 나가는 만큼 주안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진리 안에서 강하고 담대해집니다. 결국은 주님을 닮아가며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온전한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구하게 되고 무엇이든지 응답받는 역사가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증표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내어 주셨으니(요일 4:10)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혜사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세상으로부터 좇아오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다 벗어버리고 진리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을 정도로 계명들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구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온전히 진리 가운데 행치 못할 때는 그만큼 하나님 앞에 담대하지 못하게 되고, 마음의 소원을 떳떳하게 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계명들을 지켜 행하며 하나님 앞에 담대히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온전한 사랑을 소유한 것이요,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진실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기대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룬 자녀들이 무수히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더욱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추천 검색어